술의 역사 흐름
인류가 언제부터 술을 즐겼는지 정확한 기원을 말하기는 어렵다. 과일이 떨어진 웅덩이에 괸 술을 원숭이가 먹었다는 얘기가 있는 것을 보면, 술은 인류 역사보다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현재 전승되고 있는 우리의 술들이 멥쌀, 찹쌀, 좁쌀 따위의 곡물을 주축으로 삼은 것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무렵에는 술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1991년 경기도 일산에서 출토된 가와지 볍씨가 5020년 전 신석기시대의 것으로 고증되어 가장 오래된 벼농사 흔적인데, 이로 보아 우리술의 역사도 5,000년 전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삼국시대
문헌을 통해 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중국 서진시대 진수(233~297년)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의 한반도 일대 고대 국가에 대한 기록 속에 술 이야기가 나온다. 이 문헌에 따르면 부여는 정월에 영고, 고구려는 10월에 동맹, 예는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의식을 거행했는데, 이때 춤추고 노래하고 술 마시고 즐겼다고 전한다. 또한 마한에서는 5월에 씨앗을 뿌리는 큰 모임이 있어 춤과 노래와 술로써 즐겼고, 10월에 추수를 끝내면 역시 이러한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 건국신화 「동명왕편」에도 술 이야기가 나온다. 천제의 아들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를 술 취하게 하여 아내로 삼아 주몽을 낳았는데, 주몽은 훗날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이 되었다. 이 신화는 고려시대 이규보가 작성한 『동국이상국집』(1241년)과 이승휴의 『제왕운기』(1287년)에 실려 있다.
고구려의 3대 왕인 대무신왕은 국내성을 침략해온 한나라 장수에게 잉어와 지주(旨酒)를 보내어 물러가게 했다. 백제 2대 왕인 다루왕은 흉년이 들자 금주령을 내렸고, 30대 왕인 무왕은 신하들과 더불어 백마강 가에서 술을 마시며 북을 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신라 3대 왕인 유리왕은 경주의 여자들을 두 패로 나누어 길쌈 경쟁을 시켰다. 이때 진 편이 술과 음식을 장만해 이긴 사람들에게 사례하며 서로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며 놀았는데, 이것이 추석의 기원이 된 가배(嘉俳)라는 학설이 있다.
712년에 작성된 일본의 『고사기』에는 술을 잘 빚었던 백제인 인번(仁番)의 다른 이름인 수수보리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수수보리가 빚은 향기로운 술을 마시고, 이 술맛에 감동한 응신천황의 노래가 수록되어 있다. 수수보리가 활동한 시기는 4세기 전후로 여겨지는데, 이 기록을 통해 백제인이 빚은 술맛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백제의 술 기술이 일본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신라 술은 맛이 좋기로 중국에까지 소문이 나서 당나라 시인 이상은(812~858년)이 “한 잔 신라주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쉬이 사라질까 두렵구나”라고 노래했을 정도였다. 경주 안압지에서 술 놀이 도구인 14면체 주령구가 발견되고, 경주 남산 자락에 유상곡수연을 즐겼다는 포석정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라 역시 술 문화가 발달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짚신 모양 토기 잔, 원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레바퀴 위의 잔, 원삼국시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오리 모양 토기, 삼국시대, 5~6세기, 가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원삼국시대에 제작된 짚신 모양의 토기 잔과 수레바퀴 위의 잔, 5~6세기 가야 지방에서 사용된 오리 모양의 토기 잔은 부장품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상과 천상을 연결해주는 새, 저승 가는 길에 타고 갈 수레와 신고 갈 짚신에 술을 실어 보냈던 것으로 보아, 술이 신과 인간을, 이승과 저승을 매개해준다는 믿음이 고대부터 있었다고 보여진다.
이렇듯 고대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술병과 술잔이 출토되고, 술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오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대에 마시거나 빚어졌던 술의 구체적인 이름과 제조 방법에 대해서는 전하는 게 없다.
고려시대
구전에 따르면 ‘면천두견주’는 고려시대 개국공신 복지겸이 아팠을 때 그의 딸 영랑이 면천의 안샘 물로 빚어서 올린 술이라고 한다. 당진시 면천면에는 영랑이 사용하던 안샘과 술을 빚고 심었다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또한 고려 태조 왕건이 고창(현재 안동)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에 삼태사의 도움을 받았는데, 당시 견훤의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던 마을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주모 안중이 견훤의 병사들에게 독한 술을 마시게 한 뒤 이를 삼태사에게 알려 승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때 안중이 담았던 술이 ‘고삼주(苦蔘酒)’다. 현재 안동 태사묘에서는 안중을 삼태사와 함께 기리고 있다.
『고려사』에 등장하는 기록으로, 성종 2년(983년)에는 개경의 번화가에 6개의 주점, 성례(成禮), 낙빈(樂賓), 연령(延齡), 영액(靈液), 옥장(玉漿), 희빈(喜賓)이 있었다. 이 주점들은 역원(驛院)이나 다점(茶店)과 마찬가지로 효율적인 대민 정책과 정보 수집의 필요성 때문에 국가에서 관장하는 것들이었다.
성종 15년(996년)에는 최초의 화폐 건원중보를 주조하게 되고, 목종 5년(1002년)에는 화폐의 유통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차, 술, 음식 등의 점포들이 교역할 때에는 화폐를 사용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숙종(재위 1095~1105년) 때에는 해동통보를 유통시키면서 중앙과 지방에 술을 관장하는 관청을 설치하기도 했다.
문종(재위 1046~1083년) 때는 양온서라는 관청을 두어서 행사에 필요한 술과 감주를 관장했다. 이때 왕이 마시는 술은 양온서에서 다스렸는데, 청주와 법주 두 가지가 있었고,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해두었다고 전한다.
인종 1년(1123년)에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이 당시의 풍속을 기록한 『고려도경』에서 고려에서는 찹쌀이 없어서 멥쌀과 누룩으로 술을 빚었고, 술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고 기록했다. 인종 14년(1136년)에는 과거제도를 정비하면서 여러 지역의 공사(貢士)를 중앙으로 보낼 때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도록 규정했는데, 이것으로 보아 술에 대한 예법에 대해 국가에서도 관심을 두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그 시절에 술을 빚어 유통시킨 사찰도 있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현종 원년(1010년)에 승니(비구와 비구니)가 술 빚는 것을 금했다. 인종 9년(1131년)에는 내외사사(內外寺社)의 승도가 술도 팔고, 파도 팔며, 또 병기를 가지고 포악한 짓을 하므로 금지시켜달라는 상소가 올라왔다. 『악장가사』에 실려 있는 고려가요 「쌍화점」에는 “술 파는 집에 술 사러 갔더니 그 집 주인이 내 손목을 잡더라”는 구절이 있어 당시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문인들의 시문 속에 구체적인 술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술을 소재로 삼은 「한림별곡」에는 황금주, 백자주, 송주, 죽엽주, 이화주, 오가피주 들이 등장한다. 술을 의인화한 해학적인 한문 소설로 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도 쓰여졌다.
한반도에 증류주인 소주가 전래된 것은 몽골의 침략기인 충렬왕(재위 1274~1308년) 시기로 알려져 있다. 『고려사』 우왕 원년(1375년)의 기록에 “사람들이 검소할 줄 모르고 소주나 비단, 금이나 옥그릇에 재산을 탕진하니 앞으로 일절 금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당시 소주가 제법 널리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유산으로 첫손에 꼽히는 것이 고려청자다. 고려청자로 만들어진 술병과 술잔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통해서 고려시대 술 문화를 풀어낼 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한 연구들도 앞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청자 사자장식 주전자와 받침, 고려시대, 11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 연꽃넝쿨무늬 주전자와 받침, 고려시대, 12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들이 통치의 수단으로 금주령을 곧잘 내린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할 때 금주령이 활용되었다. 금주령을 적극적으로 시행한 왕으로 태종, 세종, 영조를 꼽을 수 있다.
태종은 집권 초기부터 빈번하게 금주령을 내렸는데,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스무 차례가 넘는다. 세종은 재난이나 이변이 없더라도 매번 농사철에는 술을 금하는 조처를 내렸다. 영조는 지속적으로 금주령을 내렸고, 이를 어긴 사람은 엄벌에 처했다. 세종, 중종, 영조 때에는 나라에서 술을 경계하는 교서를 내려 지방 관아에 내걸도록 하기도 했다.
술을 경계하는 방편으로 고려시대부터 이어져오던 향음주례를 정비했는데, 세종이 집현전에 향음주례를 상정(詳定)하도록 명했고, 성종 5년(1474년)에 편찬을 완성하여 『국조오례의』와 더불어 일반화되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 조리서는 1450년경 궁중 어의인 전순의가 지은 『산가요록』이다. 전반부는 훼손되고 후반부만 남아 있는 이 책에는 농업에 대한 내용과 함께 229가지 조리법이 소개되어 있다. 그중에서 술에 관한 내용은 51가지의 술 빚기와 술맛 변하지 않게 하는 법 등 4개 항이 있다.
한글로 된 가장 오래된 조리서는 경북 영양에서 살던 장계향이 1670년대에 지은 『음식디미방』으로, 술 빚는 법과 음식 조리법, 저장 발효식품과 식품 보관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 책에는 모두 54종의 술 이름과 제조법이 나온다.
조선 중기 이후 술 제조법이나 효능이 소개된 대표적인 문헌들로 1541년경에 김수가 집필한 『수운잡방』, 1554년에 어숙권이 편찬한 『고사촬요』, 1610년에 허준이 집필한 『동의보감』, 1715년에 홍만선이 집필한 『산림경제』, 1809년에 빙허각 이씨가 집필한 가정백과서인 『규합총서』, 1827년에 서유구가 집필한 『임원십육지』 등이 있다. 특히 『동의보감』에 약효와 함께 술이 소개되면서, 기능성을 중시 여기는 약술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궁중의 잔치를 그린 「무신년진찬도」의 일부(1848년,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술은 산업화의 길로 내딛지 못했고, 그 명맥이 근현대로 이어오지 못했다. 온주(醞酒)라 하여 임금이 하사하는 술이 궁궐에서 빚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제법이 전해오는 궁궐 내부의 술은 없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한 술 문화는 지역의 특색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도 단절되어 전하는 게 거의 없다.
풍속을 기록한 세시기를 통해서도 술 문화를 볼 수 있다. 1846년에 홍석모가 집필한 『동국세시기』 「기타 3월 세시풍속 편」에서 “술집에서는 과하주를 빚어 판다. 술 이름으로는 소국주, 두견주, 도화주, 송순주 등이 있는데, 모두 봄에 빚는 좋은 술들이다. 소주로는 독막(지금의 서울 마포구 공덕동에서 대흥동 사이) 주변에서 만드는 삼해주가 가장 좋은데 수백 수천 독을 빚어낸다. 평안도 지방에서 쳐주는 술로는 감홍로와 벽향주가 있고, 황해도 지방에서는 이강고, 호남 지방에서는 죽력고와 계당주, 충청도 지방에서는 노산춘 등을 각각 가장 좋은 술로 여기며, 이것 역시 선물용으로 서울로 올라온다”고 했다.
조선 후기에 오면 지역마다 특색 있는 술이 존재하는데, 특히 독막과 마포나루 부근에서 삼해주를 수천 독 빚었다는 얘기가 있는 것으로 보아 술의 유통량도 늘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술은 산업화의 길로 내딛지 못했고, 그 명맥이 근현대로 이어오지 못했다. 온주(醞酒)라 하여 임금이 하사하는 술이 궁궐에서 빚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제법이 전해오는 궁궐 내부의 술은 없다. 나루터와 주막을 중심으로 한 술 문화는 지역의 특색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이도 단절되어 전하는 게 거의 없다.
현재 5대 이상의 전승 계보를 지니고 있는 문화재 술들은 조선 후기에 마을이나 반가를 중심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술들이 대부분이다.

분청사기 모란무늬 병, 조선시대, 1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편병, 조선시대, 15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그 사이를 잇는 분청사기들은 한국 문화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명품이다. 그 명품 속에 담긴 주인공이 바로 술이다.

백자, 조선시대, 15~16세기,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백자 매화무늬 각병, 조선시대,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개항기 이후
개항기 무렵 도회지의 주막은 술과 음식을 파는 음식점의 성격이 강했고, 시골의 주막은 술과 음식을 팔면서 숙박까지 제공하는 공간으로 유지되었다. 대한제국시대 경성에서 술을 판매하는 형태로 색주가, 내외주가, 반가(飯家), 전골가(煎骨家), 소주가가 있었는데, 이는 모두 음식점이다. 이곳에서는 약주, 백주, 소주를 헌주가, 소주가로부터 매입하고, 탁주는 스스로 제조하여 모두 잔술로 팔았다.
술에 세금을 부여하기 위한 정책은 대한제국 시절에 만들어졌다. 1904년 한반도에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은 그 해 8월에 한일협정서를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권과 외교권을 침탈했다. 그리고 일본 주세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일본인 메가타를 재정 고문으로 임명하여 주세 도입을 진행했다.
이리하여 1909년 2월 우리나라에 최초로 주세법이 공포되었다. 무제한 면허제를 실시하고, 해마다 11월까지 다음 해에 양조할 생산량을 소속 세무서에 신고하면 그 생산량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다.
1935년 일본인들이 작성한 『조선주조사』에 따르면, 1910년 무렵에는 조선의 전체 가구 수의 1/7이 술을 제조했다고 한다. 영업용이 아닌 자가용 제조 면허를 낸 가구가 1926년만 해도 대략 131,700곳이었는데, 1929년에 265곳으로 줄어들더니, 1932년엔 단 한 곳만이 남게 된다. 결국 1934년에 와서 자가용 술 제조 면허제를 폐지해버리는데, 이때부터 집에서 술 빚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 되었다.
1930년을 전후로 주세가 전체 조세에서 지세(地稅)를 제치고 1위를 차지하게 된다. 1934년의 기록을 보면 조세 총액 5,612만 원 중에서 주세가 29.5%를 차지하여 지세 26.2%를 앞서고 있다. 조선총독부는 통치 자금의 확보 차원에서 술을 엄격히 통제하고 세금을 각출했다.

일제시대 밀조주(밀주) 금지 공고문
1930년대 이전에는 주점에서 막걸리를 직접 빚어서 잔술로 팔았으나, 주세법이 강화된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양조장에서 받아다가 파는 음식점들이 늘어났고, 일반 가정에서도 양조장이나 배급소에서 막걸리를 사다가 마시는 상황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인 1916년의 술 생산량을 보면 조선 탁주 75%, 소주 14%, 청주 5%, 약주 4%, 기타주가 2%를 차지했다. 1916년에서 1933년까지 술 생산량 중 조선 탁주 생산량은 72~89%에 달했다.
1930년대 이전에는 주점에서 막걸리를 직접 빚어서 잔술로 팔았으나, 주세법이 강화된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양조장에서 받아다가 파는 음식점들이 늘어났고, 일반 가정에서도 양조장이나 배급소에서 막걸리를 사다가 마시는 상황이 되었다.
술 소비 형태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서울의 중산층에서는 약주를 즐겼고, 서울 이북 지방에서는 소주를 주로 마셨으며, 서울 이남에서는 탁주를 주로 마셨다. 남부 지방은 소주 소비가 적었는데, 탁 · 약주가 변하기 쉬운 여름철에만 소주를 마셨다.

1932년 우리나라의 술 생산량(『조선주조사』 수록)
술의 소비 형태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었다. 서울의 중산층에서는 약주를 즐겼고, 서울 이북 지방에서는 소주를 주로 마셨으며, 서울 이남에서는 탁주를 주로 마셨다. 남부 지방은 탁 · 약주가 변하기 쉬운 여름철에만 소주를 마셨다.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식량 확보를 목적으로 1938년에 양조용 쌀의 할당제를 실시하고, 1940년에는 탁주 이외의 술은 배급 제도를 실시했다. 이때 탁주 제조를 제한하지 않은 것은 밀주가 성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밀주 제조로 적발되는 이들이 많았는데, 1939년에 17,182건, 1943년에 34,564건이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출범 이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하고, 1949년 9월에 주세 정책의 방향을 설정하는 주세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1950년 6 · 25전쟁과 1960년대 경제개발 시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주세 정책은 일제 강점기의 정책 기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곡이 부족하고 국세의 주세 의존도가 높은 시기라, 술에 사용되는 곡물을 철저히 통제하고 양조장을 감독했다. 전체적으로 술 정책이 양곡 수급 정책과 맞물려 움직이다 보니, 양조 산업의 발전이나 소비 문화의 다양성을 배려하지는 못했다.
1965년 3월에는 양곡을 원료로 하는 주정과 소주 제조를 금지했고, 1966년 8월에 탁 · 약주 제조에 쌀 사용을 금지하고 수입 밀가루를 주원료로 사용하게 했다. 이전까지는 약주나 탁주는 쌀이 주원료였고, 밀이나 밀가루는 주로 누룩을 디뎠다.
주원료가 변하면서 술맛이 달라지자 술도가들이 혼란에 빠졌다. 국세청 양조시험소에서는 백국(白麴)을 파종하여 만든 밀가루 누룩을 개발하여 보급했다. 그러나 막걸리는 밀가루 막걸리로 적응했지만, 약주는 색깔이 푸르게 나오고 쉽게 산패하면서 적응에 실패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 걸쳐 정부의 양조장 통합 정비 정책에 따라 양조장들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약주 업체들이 쌀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경쟁력을 잃게 된 것이다. 1963년에 498개였던 약주 업체는 1970년에는 259개, 1975년에는 45개, 1990년에는 24개로 줄어들었다. 소주 회사는 증류식 소주가 퇴조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통합 정책에 따라 1977년에 각 도별로 한 개씩 모두 열 개의 대형 희석식 소주 체제가 성립되었다.
술 소비량은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로 꾸준히 늘어났고, 소비되는 술 역시 다양해졌다. 막걸리의 경우는 1974년에 168만kl라는 역대 최대 생산량을 기록했다. 하지만 차츰 소주와 맥주의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1980년대 들어 막걸리의 퇴조가 눈에 띄게 나타났다. 그러다 올림픽을 치르던 1988년부터 맥주 생산량이 막걸리 생산량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급기야 1990년대에는 맥주 생산량이 전체 술 생산량의 50%를 넘어서고, 막걸리는 추락을 거듭하여 한 자리 숫자까지 하락하게 된다.
막걸리 퇴조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난 1980년대,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문화로서의 전통주에 대한 계승과 보전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1986년에 ‘문배주’, ‘면천두견주’, ‘경주교동법주’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도별 무형문화재들도 지정되었다.
1990년부터 다시 쌀로 술을 빚을 수 있게 되면서 전통주가 상품화될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 이때 쌀막걸리도 재등장했다. 1995년부터는 집에서 가양주를 빚을 수 있게 되면서 양조장 밖 공간에서도 술을 빚고 체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2009 햅쌀 누보 막걸리’ 출품작들2009년에 처음 햅쌀막걸리 출시 행사가 열린 이후로 해마다 10월 말이면 햅쌀막걸리가 출시되고 있다.
2009년부터는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으로 해마다 우리술 품평회가 열리고 있고,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막걸리 날’로 정하여 햅쌀막걸리 출시 행사도 치르고 있다. 2010년에는 전통주 산업법이 마련되어 전통주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체계화되었다.
2009년부터는 농림축산식품부 주관으로 해마다 우리술 품평회가 열리고 있고, 10월 마지막 주 목요일을 ‘막걸리 날’로 정하여 햅쌀막걸리 출시 행사도 치르고 있다. 2010년에는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약칭 전통주 산업법)이 마련되어 전통주 활성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체계화되었다. 또한 국세청에서 주도해왔던 술의 정책도 분할되어, 국세청은 면허와 주세,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위생, 농림축산식품부는 진흥이라는 업무를 나눠서 하게 되었다. 그리고 2016년 2월에는 소규모 주류 제조 면허 법령이 만들어져, 식당에서 양조 면허를 받고 과거 주막처럼 직접 만든 술과 음식을 팔 수 있게 되었다.
'술' 카테고리의 다른 글
YCK 술의 역사 (2) | 2023.10.28 |
---|---|
술 (1) | 2023.10.28 |
열풍 속 전통주 시장 확대 과제는? (0) | 2023.10.28 |
‘1%의 시장, 전통주 붐(Boom)은 온다!’ (2) | 2023.10.28 |
제주 술! 안녕허우꽈? (2) | 2023.10.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