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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하마스)의 전쟁

by 대무1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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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

전 세계의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하면서 시작된 분쟁이다. 2차 대전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이 국가를 수립하면서 유대인과 아랍인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으며, 4번에 걸친 중동전쟁으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자 이 지역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난민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PLO는 1993년 '오슬로평화협정'을 비롯하여 여러차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으나, 합의안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서 이 지역의 유혈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스라엘 가자지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의 분쟁의 역사는 유대인들이 고국 팔레스타인(시온)에 유대 민족국가를 건설하자는시오니즘운동에서 시작한다. 이 운동으로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하면서 아랍인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1차 세계대전중 영국은 전쟁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시오니즘을 지지함과 동시에 아랍인들의 협력을 요청하였고, 양자 모두에게 팔레스타인을 내주겠다는 약속을 함으로써 전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 아랍 측에 대해서는맥마흔선언, 유대인 측에 대해서는밸푸어선언을 한 것이다.

팔레스타인 지역 유대인의 정착과 이산, 그리고 시오니즘

 

기원전 15세기경 팔레스타인 지역에 들어온 유대인은 BC997년 다윗왕에 의해 처음으로 국가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외세에 의해 망하고 유대인들은 식민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특히 기원전 100년 무렵엔 로마의 속령이 되어 지배를 받으면서 박해를 받게 된다. 이에 유대인들은 제1차 유대전쟁을 일으켰으나 AD70년 로마에 패하면서 예루살렘이 정복당했으며 신전도 소실되었다. 이후 135년 제2차 유대전쟁에서도 패하여 유대지역은 황폐해졌고 유대인은 세계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이산)’라고 한다.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은 637년 이슬람교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했으며, 1620세기 초에는 오스만제국이 점령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팔레스타인은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성지(聖地)가 함께 있는 복잡한 종교적 지역이 되었다. 터키령이었던 팔레스타인은 제1차 세계대전에 터키가 패하면서 영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다.

그런데 19세기 후반 들어 국가 건설을 위해 투쟁하던 유대인은 국가 건설의 예정지를 성서에서 약속한 땅 팔레스타인으로 정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의 시온산은 이들의 국가 건설 상징이었으므로 시온산이 있는 땅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 운동을 전개하며,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이처럼 시오니즘에 의한 유대인의 이주가 계속 증가하자 아랍인의 유대인 배격운동이 격화되었다.

그리고 1차대전 중인 1917년 영국의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을 위한 민족국가를 인정한다는 '벨푸어선언'을 했다. 이것은 미국 내 유대인의 환심을 사 미국을 1차 대전에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1차 대전 당시 독일 편에 있던 오스만제국 내의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아랍인에게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 독립을 약속하면서 향후 분쟁의 불씨를 제공하였다.

이스라엘 건국과 1~4차 중동전쟁

1930년대 나치의 유대인 학살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귀환이 증가하여,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에는 유대인 이주자가 팔레스타인 인구의 31%, 유대인이 소유한 땅은 팔레스타인의 5.67%가 되었다. 이처럼팔레스타인 문제로 인해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장이 고조됨에 따라 영국은 이 문제를국제연합에 일임하였다.그 결과 194710월 유엔은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 48%와 유대지구 52%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가결했으며, 이스라엘 성립이 선언되었다. 그러나 시오니즘 운동은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민족의 독립을 반대하고 아랍주민을 쫓아내어 오직 유대교도만으로 나라를 이루려는 유대인들의 건국운동이므로, 팔레스타인 내 아랍 주민을 배제하고자 하였다.

이후 1948514일 이스라엘의 독립이 선포되었고 곧바로 전쟁으로 이어졌다. 이집트,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시리아, 레바논 등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와 동시에 이를 거부하고 선제공격을 가함으로써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 결과제1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승리하면서 유대인은 본래 유엔 분할지역보다 50% 많은 지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1974년까지 4차례의 중동전쟁을 치르면서 이스라엘은 시리아의 골란고원, 요르단강 서안지구, 가자지구와 시나이반도를 점령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된다.

중동 지역의 갈등과 팔레스타인인의 저항

분쟁이 끝이지 않던 아랍세계와 이스라엘은 1979'캠프데이비드 협정' 체결로 숨을 돌리게 된다. 1979년 지미 카터 미 대통령의 중재 속에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베긴 이스라엘총리 간에 '캠프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되면서, 이스라엘은 점령지인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아랍국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스라엘도 시리아로부터 빼앗아 점령하고 있던 골란고원의 반환을 거부해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한편,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1964년 결성된 비밀저항조직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는 세계 곳곳에서 테러 등으로 대이스라엘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스라엘도 1982년 레바논 PLO 본부를 습격하면서 1960년대 이후 양측의 유혈사태는 계속됐다.

198712월 팔레스타인인들의 집단적인 반이스라엘 투쟁인 '인티파다(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이후 폭력사태가 끊이지 않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평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이스라엘과 PLO19939월 영토와 평화의 교환을 원칙으로 한 '오슬로평화협정'을 체결, 팔레스타인자치국 건설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9471일에는 아라파트 PLO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5일 팔레스타인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러나 19973월 팔레스타인에 강경 입장을 고수하는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동예루살렘지역에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강행하였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팔레스타인 측도 과격 이슬람단체들이 협상을 거부하면서 이스라엘을 겨냥한 테러를 잇따라 감행, 협상은 위기국면에 다시 빠지게 됐다. 이후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후세인 요르단 국왕의 중재로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간에 평화협상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19981023일 영토와 평화의 교환 협정의 마지막 쟁점들을 해소하고, 최종 협정문안을 작성했다(와이리버 협정). 그러나 동예루살렘의 주권을 서로 가지겠다고 주장하는 양측의 대립이 결정적 걸림돌이 돼 협상은 난항을 거듭했고, 2000928일 아리엘 샤론 리쿠드당 당수가 동예루살렘 내 이슬람성지를 방문하면서 평화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중동평화 로드맵 수립

20034월 미국과 유엔, 러시아, 유럽연합(EU) 등 국제사회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유혈사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는 것을 골자로 한 '중동평화 로드맵'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2005912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서 완전 철수하면서,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이후 계속돼온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점령이 38년 만에 종식됐다. 하지만 정착촌 철거를 선언한 이스라엘의 아리엘 샤론 총리가 극우파인 리쿠드당의 반발을 샀고, 이 상황에서 20061월 갑작스런 뇌졸중으로 총리 임무 수행이 중단되었다.

네타냐후 총리 취임과 계속되는 갈등

20092월 극우파인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새로 취임하면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네타냐후 총리는 중동전쟁(1967) 이전의 영토를 반환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스라엘의 안전을 이유로 협상할 수 없으며 또한 수도 예루살렘의 분할 역시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팔레스타인은 네타냐후가 20119월 동예루살렘에 대한 종전의 정착촌 건설 중단 조처를 연장하지 않자 협상을 즉각 중단했으며, 이를 둘러싼 양측 간 갈등은 계속되었다.

20215월에는이스라엘 군경이 동예루살렘 알아크사 모스크에 진입해 반이스라엘 시위를 강경 진압하자, 하마스가 이에 대한 보복공격을 가하고이스라엘이 바로 공세에 나서면서 11일간의 분쟁이 벌어졌다.이 분쟁으로가자지구에서232명이 사망하고이스라엘에서는12명이 사망하면서,2000명 이상이 사망했던2014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50일 전쟁 이후 가장 피해가 큰 유혈 분쟁으로 기록됐다. 이후 2023107일에는 하마스가이스라엘 남부를 겨냥해 수천 발의 로켓포 공격을 감행하고 분리장벽을 넘어 이스라엘 군인과 민간인 다수를 인질로 잡는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이에 이스라엘이 해당 상황을전쟁으로 규정하고 강력한 보복을 예고한 뒤 대대적인 공습을 가하면서, 해당 충돌이1973'욤 키푸르 전쟁'이후 최대 격돌이 될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분쟁약사

시오니즘(zionism,19세기 후반~)

중ㆍ동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운동을 시작하였다. 이로 인해 1933년까지 팔레스타인에 238,000여 명의 유대인이 모여들어 아랍인의 반발을 샀다.

밸푸어 선언(191711)

1차 세계대전 중 영국의 외무장관이었던 아서. J. 밸푸어(Balfour)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 건설을 지지하였다.그러나 영국은 한편으로 1차대전에서 독일 편에 서있던 오스만제국 내의 아랍인들의 반란을 지원하면서 아랍인에게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독립국가 독립을 약속(맥마흔 선언)하였다.이처럼 영국은 밸푸어 선언과 맥마흔 선언을 동시에 함으로써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물론 중동전쟁의 불씨를 만들었다.

유엔 결의 181(194711)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분할하여 유대 국가와 아랍 국가를 창설하고, 예루살렘은 국제 신탁통치 지역으로 만들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19485월 국가를 수립했으나 아랍인들은 이 결의를 거부하였다.

6일 전쟁(19676)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 등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시나이 반도와 가자지구, 요르단의 요르단강 서안과 동예루살렘, 시리아의 골란고원 등을 점령하였다.

10월 전쟁(197310)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에 선제 공격을 가했으나, 6일 전쟁 때 잃은 영토를 되찾는 데는 실패했다.

이스라엘ㆍ이집트 평화조약(19793)

미국 카터 대통령의 중재로, 이집트가 아랍국 중 최초로 이스라엘을 국가로 승인하고, 양자 평화조약에 서명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시나이 반도를 반환하였다.

1차 인티파다(1987~93)

이스라엘 점령 20년을 맞은 1987,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의 억압 통치에 대해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투쟁의 결과 팔레스타인인 1,000여 명이 희생되었다.

오슬로 협정(19939)

당시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의장은 상호 실체를 인정하고 테러 중단과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립가자지구와 예리코에서 이스라엘군 철수5년 내 추가 철수 등을 규정한 협정에 서명하였다.

가자·예리코 자치협정(199310)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간에 체결된,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예리코시에 대한 팔레스타인인의 자치에 관한 협정이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수립(19961)

오슬로 협정의 결과 요르단강 서안과 가자지구에서의 선거로 팔레스타인 자치의회가 구성되고, 아라파트가 수반에 당선되었다.

와이리버 협정(199810)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정부 수반,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간에 '땅과 평화의 교환'으로 불리는 와이리버 협정이 이루어졌다.

2차 인티파다(20009~)

팔레스타인 최종 지위 협상이 지연되고 이스라엘 강경파 지도자 샤론이 예루살렘 성지를 방문하자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살 폭탄 테러 등 극단적인 투쟁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그리고 이에 따라 이스라엘의 무력 진압이 시작되었다.

유엔 안보리 결의 1397(2002312)

팔레스타인을 사상 처음으로 국가로 명시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안전하고 공인된 국경 안에서 공존하는 비전을 지지한다.'고 결의하였다.

사우디 평화안(2002328)

이스라엘이 19673차 중동 전쟁 때 점령한 땅에서 철수하면 아랍 국가들이 집단적으로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한다는 내용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세자가 제안한 새로운 포괄적 평화안을 아랍 22개국 정상회담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중동평화 로드맵 서명(200364)

미국·이스라엘·팔레스타인은 2005642005년까지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창설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중동평화 로드맵'에 서명하였다.

11일 전쟁(20215)

2021510~520일까지11일간 이어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하마스 간의 분쟁을 말한다.이는이슬람교의 공동 성지(聖地)인 동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종교 분쟁,팔레스타인 자치구 내 유대인 정착촌을 둘러싼 갈등 등이 원인이 돼 일어난 분쟁으로, 2014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50일 전쟁 이후 가장 피해가 큰 유혈 분쟁으로 기록됐다. (자세히 보기)

2023년 이스라엘의 제닌 대공습(20237)

이스라엘군이 202373~4일까지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의 근거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제닌 난민촌에1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해 대규모 공습을 가한 사건을 말한다.제닌은17000여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이 모여 사는 곳으로, 해당 공습은2000년 제2인티파다(팔레스타인 주민의 봉기)이후 이뤄진 이스라엘 최대 규모의 군사작전으로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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